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여수·순천 10.19 사건 (문단 편집) == 여담 == 이 사건 이후, 그렇잖아도 불길한 취급받는 숫자인 '''[[4]]'''는 [[대한민국 육군]]의 독립 부대명에는 '''절대로''' 들어가지 않게 되었다. 14연대는 당연히 없어졌고, 일부가 반란에 가담한 4연대는 20연대(현 [[제20기갑여단]])로 재편되었다. [[대한민국 해군]] 역시 함번 및 중대급 이상 육상 부대번호에 4를 넣지 않으나, 이는 여순 사건과 별개로 [[한국전쟁]] 당시 함번이 4인 [[함정]]들이 우연히 좋지 않은 사건을 겪거나 격침되는 일이 잦아 미신에 민감한 뱃사람들의 특성상 사기에 영향을 크게 주기 때문에 생긴 방침이다. 이 사건의 여파로 6연대는 3차에 걸쳐서 일부 반란을 일으켰고 이들은 지리적인 영향상, 이현상과 14연대가 있는 지리산 대신 태백산맥이나 팔공산으로 들어가서 [[남도부]] 부대에 합류하게 된다. 결국 6연대도 없어졌다. 작가 [[리영희]]는 생전에 [[한국해양대학교]]에 재학할 때 이 사건을 목격한 적이 있다. 항해 실습을 하던 선박이 진압군 병력을 수송하던 선박이어서 여수항까지 따라가게 되었다고 한다. 여수에서 [[한센병]] 환자들을 위한 치료 시설인 애양원을 운영하던 [[손양원]] 목사의 두 아들도 이 사건 때 좌파계열 학생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손목사의 두 아들은 당시 우익 성향의 학생단체에 소속해 있었기 때문에 살해한 것으로 보인다는 이야기가 있었지만, 이 부분은 논란의 소지가 있다. 당시 순천 사범 학교는 신탁 통치에 대하여, 찬(좌파), 반(우익)으로 나눠져서 강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손 목사의 두 아들은 우익 학생 단체가 아니라 기독 학생회 소속이었다. 기독 학생회가 우익 성향이었다고 주장할 수는 있으나, 당초 첫째 아들 동인은 그런 논란에서 떨어져 있는 사람이었다. 당시, 동인을 죽인 이유는 미제에 앞장선다는 황당한 이유였다. 동신은 동인의 동생이라는 이유로 죽였다. 아무래도 동인이 기독교도이고 기독 학생회를 이끄는 입장이었던 게 가장 크게 작용했던 것 같다. 동인, 동신 형제를 죽였던 좌파 학생 중 한명인 안재선(손 목사가 양자로 받아들인)도 이와 비슷한 증언을 했다.] 손양원 목사는 자신의 두 아들을 살해한 학생인 안재선 씨를 '''용서하고 양자로 삼았다''' 이런 손양원 목사의 모습은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별명을 낳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전쟁]]이 터지고 손 목사는 피난하지 못한 한센병 환자들을 지키기 위해 교회에 남아 있다가 여수 지역으로 온 [[조선인민군]]에게 총살당하고 말았다. 사건이 처음 발생했을 당시 14연대의 주둔지는 현재의 여수시 신월동 일대로 [[한국화약]] 여수공장이 있다. [[대한민국 해병대]]가 창설된 계기가 된 사건이다. 해상에 인접한 특성상, 진압에 [[조선해안경비대]]도 동원되었는데, 함 승조원을 [[해군 육전대]]처럼 차출하거나 국방경비대를 태워 상륙시켜 운용하는 등엔 행정 절차 등이 복잡하고 육[[해군]]간 연계력이 떨어져, 해군이 직접 운용할 수 있는 지상전 및 상륙전 병력의 필요성이 제기되자 [[손원일]] [[제독]]이 이를 관철시켜 창설한 것이다. 해군 역시 진압 과정에서 기관총으로 화력지원하던 경비정 승조원 1명이 육상의 반란군이 쏜 총에 맞아 사망, 전사자를 냈다. 육군 [[간호장교]]단이 '''최초로''' 활약한 사건이다. 그래서 크림전쟁과 함께 [[간호사]] 면허 국가고시 단골출제로 간호학도들에게 익숙하다. '''[[박정희]]도 이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 그는 집안 어른들이 정해 준 [[김호남]]과 결혼하여 [[박재옥]]이라는 딸도 있었지만, 그 사실을 숨기고 [[이현란]]과 결혼을 전제로 동거하고 있었다. [[이현란]]은 [[함경남도]] [[원산시]] 출신이지만 [[공산당]]이 싫어서 월남했는데, 이 사건으로 인해 [[박정희]]에게 실망하게 되었고, 결국 두 남녀는 결혼하지 못하고 끝내 헤어졌다. 이후 이현란은 한국전쟁 때 대구에서 아주 우연히 마주친 것을 제외하면 박정희와는 다시는 만나지 않았고, 일반인(고등학교 교사)과 결혼해서 평범한 가정을 이루며 살다가 사망했다. 한편 박정희는 여순사건 이후 대대적으로 벌어진 [[숙군]]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여 살아남는다. [[순천시]]의 각 오래된 초등학교들에는 국민학교 시절 학교 운동장에서 학살이 일어나 단체로 생매장했다는 [[괴담]]이 존재한다. 2016년 4월 30일 여순사건 당시 세계적인 종군기자로 명성을 떨친 칼 마이던스가 남긴 사진이 재미사학자 유광언 씨의 기증으로 공개되었다. [[http://www.yonhapnews.co.kr/pictorial/index.html?issue_id=IC20161441&issue_div=all&template=undefined|보러 가기]]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